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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3. 13:02 - 아스트랄 동짜몽

사랑과 증오는 한 끗차이,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지금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영원을 이야기하며 상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수많은 커플, 연인들 -

불행히도 이들중 대다수는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몇 명의 연인을 만난다. 죽을 날까지 사랑을 속삭이는 건 그 몇 명중 단 한 명이다.

그 필연의 과정을 위해 우리는 '헤어짐'을 감수한다. 헤어지고, 또 헤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에 황홀해하면서, 여전히 '헤어짐'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익숙하다고 하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몇번의 헤어짐을 겪다보면 마치 살점이 다 떨어져나가 빈껍데기만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문제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랑받고 싶어한다' 그 연결고리가 빠지는 순간, 그 순간은 어느 정도 '미침'을 경험한다. 누구나 말이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순간이다.

왜 헤어져야만 했는지, 왜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하는지, 내 자존심을 짓밟은 너에게 저주를 퍼붓고, 잘 살라고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나보다 못됐으면 - 뒤에 만나는 연인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서 만나면 만날 수록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는게 보통 사람의 헤어짐이다. 이 상황에서 증오는 비정상적인 건 아니다. 사랑했던 만큼 증오한다는 말도 맞다. 내 마음속에 들어와있던 그 사람의 크기만큼 텅 빈 공백을 차지한다는 말도 맞다. 공허함 속에서 외칠 수 있는 건 분노와 원망 뿐이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폭풍 속에서 사랑에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이 드러난다.







상대방에 대한 원망, 미움, 분노 같은 마음은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한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사람이 그 사람의 가장 큰 안티가 된다는 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참 비극이지만, 대부분의 연인들이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그 마음은 그렇더라도 결과는 다르다. 미성숙한 사람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고통과 아픔을 그대로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 사람의 인생에 확실히 인지시켜줘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의도로 스토킹, 폭력, 협박 등의 행동들을 한다. 증오를 계속해서 증폭시키고 결국 끝에 다다른다. 몰락이다.


다른 한편은, 이별에 대해 아픈 마음을, 그 사람에 대한 분노와 같은 감정을 추스리는 데 집중한다. 차곡차곡 쌓고 정리하고 서랍정리를 하듯 추억들을 접어 정리한다. 누구에게나 무엇이든지 정리의 시간은 필요하다. 감정이 어지러울 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먼지처럼 눈 앞을 가리는 작은 감정들을 가라앉히고 과거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미있게도 이별은 이 정리의 과정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가 된다. 그 기억을 버린다던가, 저주한다던가 하지 않아도 한번 뒤돌아보고 좋았던 기억 나빳던 기억을 객관적으로 마치 영화 한편 본 것처럼 흘려보내면, 남은 건 지금 현재 자신만 남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된다.





이 이별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내가 만날 '다음 사람' 때문이다. 여전히 증오의 먼지가 날리고 있다던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봤더니 여전히 그 사람의 기억이 파편처럼 날아다니고 있다면 새로운 사랑은 진행될 수 없다.


증오의 마음은 당연하다. 이해한다. 누구나 그렇기에.

하지만 그 한끗 차이의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반대로 생각해보면 증오에서 사랑으로 넘어오는 것도 마음 먹기에 달렸다.

미워하는 그 사람을 과거에 묻어두고, 증오 대신 다시 사랑을 싹띄울 수 있는 건강한 내 마음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의 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