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15. 3. 1. 21:14 - 아스트랄 동짜몽

사랑의 방식: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어느 동화가 있다.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는 '순수'한 여인. 아무런 티가 묻지 않은 백지 같은 그녀가 우연한 계기로 백마 탄 왕자를 만난다. 프린스 차밍. 매력이 넘치는 그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 그녀는 동시에 그의 '공주'가 된다. 하지만 곧 장애물에 부딧힌다. 이들에게는 시부모의 반대도, 출생의 비밀도, 마녀의 계략도 없었다. 문제는 왕자였다. 그가 지독한 변태였던 것이다.

(약 스포일러 있음)


1.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살아가는 방식. 또, 사랑하는 방식이. 백이면 백마다 그 방식이 다른 것이고, 두 사람이 만난다는 건 그 방식이 맞부딧히는 걸 의미한다. 서로가 100프로 맞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내 방식, 너의 방식 한 수씩 물러주는 것부터 로맨스가 진전되기 마련. 하지만 그러다 고민이 발생한다. 

"내가 이 사람의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미국 내에서 신드롬, 그리고 그에 따른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영화로 나왔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지기로는 남성이 아닌 '주부들을 위한 포르노'로 표현되었다. 영화를 보자, 그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서문의 이야기 그대로다. 만고불변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다. 그 타겟층의 나이가 19금 이상으로 올라갔다는 것과, 늑대의 유혹이나 트와일라잇처럼 수많이 변주되었던 이야기처럼 한 가지 '변수'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변수가 문제다. 남 주인공 그레이의 '사랑하는 방식'. 순수한 아나스타샤는 이 방식과 지독하게 씨름한다. 자신이 살아왔고, 배워왔고 생각해왔던 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레이의 방식에 혼란스러워한다. 영화 중반 즈음에 아나스타샤가 집으로 돌아가 하룻밤 묵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척이나 서로에게 다정한 타입인 부모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새삼 생각한다. '그래, 이게 정말 사랑인데'


하지만 이미 사랑에 빠졌는 걸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레이가 변태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자신이 그렇게 바꾸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나름대로 밀당을 하고 치고 빠져도 변하지 않는다. 그 실랑이가 1편 내용의 전부이다. (속편이 있다는 걸 아는 관객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 속에 남은 건 그레이라는 남자와 이렇게까지해서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지그렇게까지해서라도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아나스타샤에 대한 공감 혹은 동정심이다.


2. 이 사람과의 만남, 이어갈까 말까

간단하다. 머리 속에는 엄청난 생각들이 오고가겠지만 사실 그 공식이란 참 간단한 것이다.

내가 상대의 어떤 문제, 그레이의 그림자같은 변수를 마주해서 매우 힘들다고 한다면 누구나 헤어짐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걸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렇다.

'내가 이 사람으로부터 얻을 무언가가 그 변수보다 클까'


그레이는 아나스타샤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그녀에게 이것저것 요구를 하자, 아나스탸샤가 묻는다.

"그래서 제가 얻는건요?"

그러자, 그레이가 답한다. "나"


그레이의 변태 성향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그와의 만남에서 얻는 것이 있는가. 아나스타샤는 고민한다.

그레이의 매력, 재력, 스마트한 그 모든 것 vs 그레이의 변태성향



이 두가지 모두 그레이가 가진 것이고 바꾸거나 할 수는 없다. 결국 그레이의 매력들이 자신에게 변태성향을 이길 정도로 크게 다가온다면 만남은 이어가는거고, 그 반대라면 헤어지는 거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 용인할 수 있는 '변수'란 딱 여기까지다. 우리의 모든 연애도 마찬가지고.


자, 더 확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레이의 변태 성향만 놔두고 그의 모든 걸 싹 다 벗겨버리는 것이다. 어떨까? 아나스타샤를 처음에 만난 것이 회사 꼭대기층의 CEO실이 아니라, 어느 허름한 술집이고 그레이는 대학을 갓 졸업 후 그녀가 일하는 철물점에서 잠깐 일하러 오면서 두번째 재회를 한다. 약간의 호감이 있어 그의 세들어사는 집으로 갔더니 방에는 온통 채찍, 수갑 등이 있다. 그의 컴퓨터 인터넷 기록에는 변태 사이트들이 가득하다.


사랑에 대해 눈이 멀었을 때는 자신이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그 포인트 때문에 다른 단점들이 생각보다 크게 안보이기 마련이다. 아나스타샤 혹은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쌍욕을 하고 도망쳐나왔을 것이 당연할 터, 그 치명적인 단점을 살금살금 커버하는 강력한 그레이의 것들이 눈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3. 아나스타샤, 도망쳐!

영화를 보면서 여자들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느끼는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우리나라에서도 적치 않은 반향 그리고 영화 관객층 거의 모두가 여자인 것을 보면 앞에서 잠깐 이야기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초기 어필을 한 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의 감상평은 하나였다. '아나스타샤 도망쳐!'

차라리 아나스타샤의 오랜 친구였던, 사진도 잘찍어서 개인전을 연다는 호세와 연결되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나쁜 남자, 매력남, 억만장자, 모성본능을 일으키는 약한 모습, 그리고 숨겨진 과거. 전부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여성들은 아나스타샤에 자신을 대입시켜 '대리만족'을 하려고 하겠지만, 그게 진짜 만족일까? 이 판타지적 요소들은 사실 '진짜 그레이', 즉 변태인 그를 숨기려고 하는 혹은 상대를 미혹시키려고 하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우리도 사실 다 안다. 사랑이란 것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기적이고 약하고 부서지는 것임을. 우리는 우리를 믿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감정은 수없이 변하고 변한다. 초기 감정은 말그대로 상대의 화려한 눈속임에 속아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 상대의 '진짜'는 저 깊은 속에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겉을 믿고, 안의 '확인하지 못한 미확인 상대'를 확인하지 않거나 알더라도 무시한다. 지금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까.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레이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가 그나마 이렇게 '로맨스'처럼 표현이 된 것은 아나스타샤의 '밀당' 덕분이었다. 그 미확인을 확인하려고, 그의 마음을 떠보는 것 말이다. 어떤 여대생이 나와 그레이를 보고 만나자마자 그가 내미는 계약서에 '좋아요' 백만개를 눌러줬다면 아마 이런 이야기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여대생은 아마 로맨스는 커녕 그레이에게 이용당하고 단순히 '오락'을 위해, 쾌락을 위해 그녀의 육체를 이용할 뿐일 것이다. 그리고 버려지겠지. (그레이의 앞선 15명의 여성처럼)


정말 답답하고 답 안나오는 이 이야기 속에서 그나마 한 줄기 출구처럼 보이는 것이 그래서 아나스타샤의 이런 고민이다. 그의 치명적인 매력에 이미 넘어갔음에도 그가 하자는대로 하지 않는 건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다. 거기서 '내가 이 남자와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살면서 한번 만나보기 힘든 프린스 차밍을 만났는데, 그 모든 메리트를 일단 뒤로 하고 상대의 '진짜'와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가 프린스차밍이 아닌데도, 세상 떠나갈 듯한 고민을 하는데 말이다.


#나가며

영화 내내 애를 쓰는 건 아나스타샤 뿐이다. 그레이는 자신의 매력을 믿고 그냥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 그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그를 이해하려고도 한다. 그레이는 그런 그녀에게 말한다. "그냥 내가 하자고 하는대로 하면 안돼?"


바로 '네!'라고 말한 누군가도 있겠지만, 연애에서는 절대로 그렇게하면 안된다. 연애는 두 사람의 만남이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종속되는 것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두 사람의 다른 방식이 평등한 노력으로 가까워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사랑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레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부리는 것 뿐이다. 수많은 매력과 억만장자라는 요소로 치장한 변태 어린아이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그레이'가 있다. 남자든 여자든. 그에게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이 있다. 물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싶겠지만, 내 안에 나도 발견하지 못한 추함이 있든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것들이 있다. 로맨스가 진행되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한다. 다른 방식을, 우리가 정말로 서로 다른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 과정이 미치도록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그건 누구나 겪는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사람의 '진짜'를 발견했냐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단점은 커버 가능하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영화는 아나스타샤가 그레이의 그걸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이 겹겹히 쌓여있는 대외용 얼굴 밑에 숨겨져 있는 단점 많고 상처 많은 그 얼굴 말이다. 이 관계를 이어갈지 가지 않을지를 결정짓는 키포인트이기 때문에.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그레이는 누구인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2015)

Fifty Shades of Grey 
7.2
감독
샘 테일러-존슨
출연
제이미 도넌, 다코타 존슨, 제니퍼 엘, 일로이즈 멈포드, 빅터 라수크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미국 | 125 분 | 2015-02-25
글쓴이 평점